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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서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서평"

 

 

 

들어가며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1984년 작품으로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쿤데라는 1929년 체코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처녀작인 <농담>을 통해 프랑스로 망명한 후 프랑스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들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해학과 지성, 반어와 철학, 인간의 양면성과 삶의 모순을 담아내고 있다. 소설이면서도 한권의 심리학책이나 철학책을 탐독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될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심오하면서도 어렵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90년대 초이다. 이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는 사회, 문화적으로 변화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와 사상이 박탈당했던 군사독재시기를 막 끝마치고 민주화로 나가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때이며, 사회적으로는 88서울 올림픽 이후부터 불기 시작한 국제화, 세계화가 한창 진행 중 이었고, 문화적으로는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흐름이 일고 있었다. 80년대의 길고 어둡던 터널을 지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환골탈퇴의 시기였다. 국가 경제의 성장도 당시 사회분위기에 한 몫 단단히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쟁취하기위해 희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이 책이 출간되었고, 당시 많은 식자층들에게 의미있는 화두를 던져준 책이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도 소련이 프라하를 침공한 시기로 우리에겐 ‘프라하의 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가는 이러한 시대적 혼란기 속에서 모든 인간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남녀의 완벽한 사랑을 그려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내용소개 및 줄거리 요약

이 작품의 주인공인 외과의사 토마스의 사랑은 시골 여급으로 일하던 테레사가 바구니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버린 아기처럼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메타포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토마스는 한 여자와의 사랑에 안주하지 못하고 수많은 여성들과 에로틱한 우정 관계를 즐기는 일명 서사적 난봉꾼이다. 그가 여성들을 쫓아다니는 이유는 객관적인 여자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지배하려는 욕구에 의한 것이다. 그 동기는 세상을 정복하려는 소망이었다. 그에게 여성은 두려움과 열망의 대상이었고, 그 타협점이 에로틱한 우정이었다. 에로틱한 우정이 절대로 공격적인 사랑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그는 여자친구들에게 상대의 삶과 자유에 대해 요구하지 않기를 주의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 출장에서 알게 된 카페의 여급 테레사가 찾아오면서부터 그는 비로소 삶의 무거움에 대해 배우게 된다. 하지만 그의 외도는 테레사의 질투를 자극하고, 토마스는 테레사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그녀와 결혼한다. 책임지지 않는 가벼움의 세계 속에 살던 토마스에게 테레사는 무거움 그 자체다. 토마스에게 있어 사랑과 성 행위는 별개의 것이었지만, 테레사는 육체적 사랑의 가벼움을, 책임을 지우지 않는 육체적 사랑의 오락성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토마스가 자신을 다른 여자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는 것을 못 견뎌하며, 한시라도 토머스의 무게를 곁에 느끼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한다. 토마스는 그녀로부터 나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토마스는 또 다른 애인 사비나로 표상되는 삶의 가벼움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와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는 여인들 중 사비나는 그의 자유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여자다. 화가인 그녀는 유부남들과의 사랑을 통해 배반의 삶을 꿈꾸는 외로운 여자다. 인생의 드라마에는 언제나 무게의 메타포가 있어서 사람은 자기 어깨 위에 떨어진 짐을 지고 살아간다. 그 짐에 이기거나 지거나 하면서...그런데 사비나의 어깨 위에 떨어진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여 아내와 이혼을 강행하고 그녀에게로 온 대학교수 프란츠를 떠남으로써, 그를 배반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주위가 텅 빈 것을 느낀다. 의식하진 않았지만 공허가 그녀의 모든 배반에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삶은 1968년 소련군의 체코 침공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혼란이 가져온 시대의 무거움은 그들의 삶을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프라하의 봄>은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념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념의 무거움 속에서 살다가 역사의 시행착오에 의해 죽어간 그들의 삶은 도대체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역사는 반복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에 한번 치어 죽은 인간의 생명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벼움과 무거움 가운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부정적이고 비도덕적이기까지 한 이들 네 명의 주인공들은 쿤데라의 손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는 메타포를 가진 존재로 태어난다. 얼핏 속물적인 사랑을 더 없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그려 내고 있다. 우리 삶의 순간순간이 수없이 반복된다는 것에 대해 무서워했던 토마스였지만, 결국 그는 '행복이란 반복에 대한 소망'이라고 말하는 테레사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같은 순간에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고, 사비나는 프란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비로소 자신이 참을성이 없었음을 후회하게 된다. 사비나에게 버림받은 프란츠는 임종의 침상에서 그가 버렸던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그녀는 그를 용서한다.

쿤데라는 사비나적인 가벼움도, 테레사적인 무거움도 일방적으로 찬양하지는 않는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처럼 인간은 모두 각자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는 모든 이념의 속박의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 솜털처럼 가볍게 비상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서평

사비나로 대표되는 가벼움, 테레사와 프란츠로 대표되는 무거움, 그리고 무거움과 가벼움의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하는 토마스의 이야기 속에서 쿤테라는 삶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삶을 어설픈 중간적 입장이 아닌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사랑의 진지함과 가벼움, 사랑의 책임과 자유, 영원한 사랑과 순간적 사랑 등 모순되고 이중적인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이란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려고 하는 작품이다.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너무 가벼워서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테레사와 토마스, 사비나의 삶은 그러한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처럼 누군가 한 사람에게 빠지지 않는, 삶을 그 자체로 즐기고 성을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 사비나처럼 정책에 대한 두려움에, 끊임없이 떠도는 삶 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벼움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사람. 테레사처럼 소유하고자 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영원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어야 하는 사람. 이들의 삶은 이 책의 제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프라하에서의 비극에서 보여 지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수많은 분쟁 지역에서 가련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삶처럼. 엄연히 사랑의 방법에는 가벼움도 존재하고 삶에도 가벼움이 존재한다. 또한 무거움 속에 가벼움, 가벼움 속에 무거움이 존재하기도 한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현실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4명의 대조된 인물상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작가의 가장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주장은 바로 똥의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쿤데라는 똥이 더럽다는 전제하에 발랑탱의 주장대로 거룩한 예수님은(신의 아들) 똥을 싸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냈다. 이 책의 주제인 가볍다, 무겁다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듯 똥의 기준도 분명하지 않다. 만약 성경의 말대로 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면 신도 배변활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천국을 상상할 때 성경말씀대로 금은보화가 가득한 아름다운 성을 떠올린다. 거기에는 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똥 자체가 더럽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p282에 보면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적 문제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의 범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그 이유 때문에(똥) 인간이 천국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발상인가! 똥 때문에 인간이 심판받는다면 인간은 그 부피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된다고 한다.

작가는 그 심오한 문제를 소설의 각 인물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아 갔다. 외과의사 토마스는 삶의 무게와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성에 집착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자유로움이며 그에게 있어 가벼움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 가벼운 사랑과 무거운 사랑이 동시에 찾아온다. 늘 가벼운 사랑만 추구해온 그의 삶에 불현듯 찾아온 테레사는 그가 지켜주고 보호해야 하는 작은 요에 담긴 아기였다. 그와 반대로 사비나는 사랑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여자였다. 그녀 역시 수많은 남자의 애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은 끝까지 토마스를 위해 정조를 지켜온 테레사다. 토마스는 테레사와 결혼한 후에도 하루에 두 번 여자와 정사를 펼칠 정도로 성 애착증이 강한 남자였다. 심지어 정부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여자와의 성관계를 꿈꾸는 그런 변태적 성향이 짙은 남자였다. 너무나 대조적인 두 사람과의 결합이었다. 가벼운 토마스에게 무거운 테레사는 지상에서의 삶을 보다 생생하고 진실하게 만들어준 사람이다. 아마 그의 삶에 테레사가 없었다면 그는 너무도 가벼워 아마 날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삶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또 반대로 그의 삶에 무거움만 존재했다면 그의 어깨는 너무 무거워 미쳐 인생을 다 살기도 전에 땅으로 꺼지고 말았을 것이다. 테레사를 통해 인생의 진지함과 진실함을 알았다면 다른 여성을 통해 자유함과 즐거움을 얻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립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무거움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삶이 너무나 버겁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색다른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찾아 가는 과정 속에 성장 하는 것 같다.

이 소설의 가벼움의 상징인 사비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사랑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테레사처럼 늙지도 고통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순진한 남자 프란츠는 가정을 버리고 사비나를 사랑할 정도로 그녀를 우상시하다 결국 그녀에게 보기 좋게 버림받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외로움에 목이 메인다. 모든 남자들은 그녀를 통해 자유함을 얻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내면 깊이 멜랑콜리(조울병)를 앓고 있었다. 가벼움의 상징인 그녀 역시 참을 수 없은 존재의 가벼움은 미치도록 외로운 공허감이었다. 인간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양면성을 가진 동물인 것 같다.

단 한번 밖에 살 수 없기에, 모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의 삶은 그 만큼 가벼워질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인생에 연습이라는 것은 없다.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삶이 된다.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든 그것은 결심을 떠난 나의 삶이다. 이미, 삶이라는 것은 모험을 삶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고향을 잃어버리고 향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이라는 것은 더욱더 가벼워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는 것만큼, 세상에 대해 아는 것만큼 우리의 인생은 점점 가벼워진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랑이라는 주제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의 답을 구하려고 했다. 어떤 주제이든 마찬가지일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물음의 답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존재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유명한 책이지만 의외로 읽는 이들에게 혹평을 받는 경우도 많은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스토리 중심이 아닌 기억의 편린에 따른 이야기 전개라서 그럴 수도 있고 모티브 자체가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원론, 영원회귀 같은 이해하기 힘든 사상이라서 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어 내려가기 어려운 작품은 아니었다. 읽는 이에게 충분히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많은 생각을 해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